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10세 (문단 편집) === [[종교개혁]]의 불씨 === 예술을 사랑하는 레오 10세는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속행했다. 그가 진행한 작업은 자신의 초상화, [[시스티나 경당]]의 벽면, [[바티칸]] 회랑의 벽화 등이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이야 전임교황 때부터 꾸준히 증축해오던 차였으니 별로 다를 바는 없겠지만, 특유의 낭비벽과 적절하지 못한 인력 배치로 인해 공사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앞서 사치를 제외했다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전쟁, 낭비벽, 가문 퍼주기 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재정난을 끼친 것이다. 다만 [[면벌부]], 정확히 표현하자면 '헌금 받고 대사 주기'는 레오 10세의 실책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레오 10세 이전 교황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정기적으로 또는 특별히 필요하다 인정될 때 '''[[대사]]령'''을 반포하여, 가톨릭 신자 개개인이 절실한 회개를 한 뒤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하고 나서 [[교황]]의 명령으로 지시된 신심행위를 이행하는 절차를 밟으면 모든 [[죄]]와 그에 따른 [[연옥]]에서의 [[벌]]을 용서받을 수 있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는 현대 가톨릭도 동일하다. 당장 2015~2016년 기간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며 [[고해성사]]와 주요 지정 주교좌 [[성당]] 순례 및 [[미사]]참례와 지정된 기도 및 회개를 하면 세계 어느 [[가톨릭]] 교구에서든 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보속 방법은 크게 2가지로, 기도와 [[성지순례]]로 대표되는 신심행위와 봉사활동 등의 선행이 있었다. 레오 10세는 이를 이용하여 대성당 건축 특별 대사령을 반포, '''"[[성지순례]]나 선행이 어려우면 자선헌금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일정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대사를 뿌리기 시작했다. ([[면벌부]]에 대해선 해당항목 설명 참조)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헌금으로 대사를 받을 수 있는가'이다.[* 물론 신학적으로 가장 뜨거운 떡밥은 고해성사와 대사의 효용성이고 루터 등도 이것을 비판하였지만,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논란은 역시 돈 문제(...)이다.] 사실 이 당시는 기존 관례와 비교하여 볼 때 문제는 없었다. [[성지순례]] 같은 기존의 보속 방법은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있었으나 점점 보속이 가벼워지면서 헌금으로 보속을 하거나 대사를 받는 게 일반화되었고 대중들도 이를 선호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평생에 딱 한번만 받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이를 일생에 몇 없는 무거운 사건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보속 역시 굉장히 강하게 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유럽]]대륙에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고해성사를 전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보속 역시도 그때 이후로 점점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었고, 헌금을 보속이나 대사에 쓰는 것도 이런 경향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 등으로 인해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나면서, '헌금형 대사'를 본격적으로 재정 수입에 애용하기 시작하면서 터졌다. 이미 100여년전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 때부터 남용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있었지만, 대사령과 성유물 판매와 전시로 인한 순례객은 로마교회의 큰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유로 점차 확대 되었고 [[교황청]] 분열이 끝나고 [[마르티노 5세]] 시절부터 황폐화된 로마시내를 재개발 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컸기 때문이다.[* [[콘스탄츠 공의회]]로 3명의 [[교황]]이 나란히 폐위 또는 자진사임하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로마 시는 인구가 2만 5천으로 줄어 있고 무너진 성벽으로 늑대가 출몰하는 지경이었다고. 방치된 건물들의 보수만 해도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보수공사까지 해야 했는데 이왕 보수하느니 화끈하게 재건축하자... 였다고.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중 한 명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동생으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 교황청에서도 성직매매로 돈 번 것도 좋았지만, 유력 가문에서 선제후직을 맡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마침 공석이던 마인츠 [[대주교]]직이 매물로 나오자 2만 9천 두카트에 입찰하여 [[교황청]]에서 성직을 매입했고[* 당연히(?) 최고가에 팔리며 마인츠 쾰른 잘츠부르크 [[대주교]] 같이 큰 주교구는 2만 두카트가 넘었다.] 매입과정에서 현금이 모자르니 레오 10세는 자금 회수를 위해 헌금형 대사를 8년간 승인하고 초입세를 제외한 8년간의 수입 중 절반을 상납받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지역에서 로마로의 송금은 유럽 최고의 사채업자(?) 푸거가문이 맡았다. 게다가 또다른 실책까지 겹쳤는데, 우선 당시 [[독일]] 지역에 선포된 대사의 조건을 보자. >1.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7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성흔|오상]](양손, 양발, 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5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3.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출처는 제임스 기본스의 저서 <[[교부들의 신앙]]>] 여기까지만 보자면 전혀 문제가 없어보일 것이다. 그런데 알브레히트는 이 조건 중에서 2번째와 3번째를 완전히 이행하였거나, 혹은 첫 번째와 2번째를 이행할 의사를 가지고 3번째를 이행한 사람은 [[고해성사]]를 줄 [[사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전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는 몇몇 중대한 대죄들은 아무 사제에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고, [[교황]] 혹은 대리자가 특정 사제권을 받은 사제에게만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낙태]]의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이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 특별한 케이스 중 하나가 [[한국 가톨릭]].] 그런데 당시에는 이 특전을 받은 사람에게 '고해 특전 준허 증서'를 주었다. 문제는 이 증서이다. 본래 대사라는 건 교회 측에서 '성지순례 하기' 같은 퀘스트를 제시하고, 신자가 그 퀘스트를 완수하면 '난 성실하게 퀘스트를 완료했으니까 잠벌은 면제 받았겠지'라고 믿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런데 '증서'를 발행하면서, 이 증서를 받아든 신자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마치 그 종이쪼가리 자체가 부적처럼 자신의 잠벌을 면제해준다는 오해가 발생하기 딱 좋았던 것이다. 물론 교회 쪽에서도 이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돈 없다면 헌금은 없어도 되고, 그냥 기도만 해도 대사로 인정된다" 같은 세부 조건들을 삽입하긴 했지만, 헌금을 내고 증서를 받는 것은 마치 이 증서를 돈으로 사는 것 같은 인상을 신자들에게 강하게 풍길 수 있었다. 게다가 '대사 설교가'를 파견했는데 이런 식의 구조는 대사 홍보를 마치 홈쇼핑 선전마냥 변질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레오 10세는 [[추기경]] 시절 수하로 부리던 요한 테첼이란 [[도미니코회]] [[수도자]]를 홍보꾼으로 파견한다. 요한 테첼 수사는 1502년부터 레오 10세가 추기경 시절부터 부린 수하로 [[폴란드]]에서 이단심문관을 지냈으나, 실상은 무늬만 수도자였다. 이전에 티롤 지방 [[인스브루크]]에서 유부녀와 간통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황제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교회의 무마로 석방된 전적과 타 지역에서 면벌부 판매로 능력을 인정(?)받은 막장인물이었다. 요한 테첼 수사는 '''"돈이 헌금함이 짤랑 떨어지는 순간 당신뿐 아니라 당신 부모, 친지의 영혼까지 모조리 [[연옥]]에서 해방, [[천국]]으로 간다!''' 등의 최신 마케팅(?) 기법으로 수익을 많이 올렸다. 그리고 테첼은 판매 과정에서 '''"[[교황청]] 도장이 찍힌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한 효력"'''이라는 신성모독성 개드립과 현재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미리 용서받는다'''는 선전을 했기 때문에 불티난 듯 팔렸다.[* 대중적으론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리까지 했다고 알려졌으나, 현대 [[루터교]]에서조차 이를 [[마르틴 루터]]에 의해 퍼진 근거 없는 루머로 보고 있다. [[면벌부#s-2|면벌부]] 항목 참조.] [[독일]]에서 알브레히트의 영지였던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뿐만 아닌 타 지역 신자들까지 테첼 수사에게 면벌부를 사러 가자, 독일 지역 제후들과 [[교구]][[사제(성직자)|사제]]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상품이 팔려야 돈을 버는 상인들까지 면죄부 판매 덕에 큰 타격을 입을 지경... 이런 분위기 속에서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었던 '''[[마르틴 루터]] 수사신부가 수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사실 [[마르틴 루터]]는 이전에도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동료 신학자나 교수들에게 강하게 비판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은 1514년 10월부터였고, 1517년 이전 비텐부르크 신학교수로 있으면서도 비판을 계속했다. 1517년의 사건이 크게 전파된 건 인쇄술 때문... 한편 루터가 파문당하기 전까지 교황권을 의심하지 않았다는데 사실이 아니다. 교황권 자체를 부인하진 않았지만, 교회의 권위는 [[성경]] 밑에 있다고 주장한 것만으로도[* 덧붙이자면 이는 [[가톨릭]]/[[정교회]]가 개신교 종파들과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즉 '교회'라는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에서 인증한 대로 '''저승의 세력으로도 무너트리지 못하는 초공간적 초시간적 초자연적 조직'''으로 보느냐, 혹은 '''단순한 신앙 공동체'''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당시 교회 입장에선 수용하기 어려웠고 더 나아가 '죄인인 교황은 속히 속죄하고 그리스도 품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선언해서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가 내걸렸다.[* 본인이 한 것인지는 여러 서적에 엇갈리나, 본인의 저작이 내걸린 것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고 내걸린 것에 대해 의견을 계속 주장했기 때문에 직접 붙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내용에 대해서는 [[95개조 반박문]]을 참조. 교황 레오 10세는 처음 [[마르틴 루터]]의 비판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독일에서 [[도미니코회]]가 잘 나가자 루터의 소속 [[수도회]]이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질투해서 비방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해인 1518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독일관구 총회에서 알아서 잘 처리하길 바랬고, 무엇보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고령으로 오늘 내일해서 차기 황제로 세력이 너무 강한 합스부르크 가문 카를보다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차기 황제감으로 점 찍었기 때문에 루터를 비호하는 작센 선제후의 심기를 별로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있다. 독일 지역에서 그동안의 경제적 수탈로 인한 반로마 감정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도 반발을 무릅쓰고 체포하진 못했다. 그리고 테첼 수사는 대사로 받은 헌금의 착복과 일부 신성모독성 발언이 인정되어 감금 정도로... 넘어가려 했지만, 마인츠 대주교는 처벌은커녕 승승장구했다.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4년 후인 1518년 [[마르틴 루터]]를 이단으로 고발했고 4월, 28세의 나이에 [[추기경]]으로 서임...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다가 죽을 때까지 마인츠 대주교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 할버슈타트 주교구 등[* 이들 주교구는 단순 교회 직위가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세속제후 지위도 가진다. 교회 십일조 뿐만 아니라 영지 주민들에게서 세속 세금도 걷고, 군대와 궁정도 보유한 명실상부한 제후였다.] '''2개 대교구와 1개 교구를 겸임'''하며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_of_Mainz|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살았다. ]] 신성 로마 제국에선 마인츠를 비롯한 성직 대주교들 3인은 황제선거권과 특권 및 왕국 재상의 명예직이 있는 고귀한 위치였고, 해당 주교구는 성직 교구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세속 제후 직위까지 같이 누리기 때문에 독일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였으며 황제 다음으로 가장 큰 영토와 권력을 누린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 * 알브레히트가 나중에 [[루터교]]로 개종했다는 잘못된 정보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1526년에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전 [[튜튼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라는 인물이 개종하여 기사단 영지 중 프로이센 지역이 세속국가로 전환되고 [[개신교]] 제후가 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사람과 알브레히트 추기경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같은 이름일 뿐 동명이인이다.[* 한 명은 브란덴부르크였다가 마인츠였다가 한 명은 또 안스바흐에 프로이센이고 뭐 이리 개판이냐 하면 유럽 귀족들은 본래 성이 따로 있지만 실제론 영지 이름을 성으로 삼는게 일반적이었다. 마인츠 대주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아들이라 직위가 없기 전엔 브란덴부르크를 성으로 썼으나 마인츠 대주교가 되고 나선 알브레히트 폰 마인츠로 불렸고, 프로이센 공작은 독일 남부 안스바흐 후작의 차남으로 튜튼기사단장이었으나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 되고 다시 개명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가 합쳐진 것은 프로이센 공작가의 후손이 끊기고, 같은 친척이며 맏사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트 대주교의 형의 고손자]가 프로이센 공작직을 물려받은 1618년이다.[* 한편 마인츠 주교 알브레히트의 본가인 브란덴부르크는 조카대에 [[루터교]]로 개종한다. 알브레히트의 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네스토르는 아들에게 숙부를 도우며 개신교로 개종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5년 후에 유언을 어기고 개종했다.] 레오 10세는 면벌부 판매의 공범인 데다가 [[독일]] 지역의 반발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사건의 해결과 동떨어진 사태 인식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토론을 요구할 때도 복종과 회개를 요구하고, 문제가 된 면벌부의 판매에 대해서도 문제삼지 않았고 오히려 마인츠 대주교와 프랑크푸르트 데어 오데르 대학, 잉골슈타트 대학 요한에크의 고소 내용만 받아들였지 자신과 수입을 나누기로 한 마인츠 대주교나 하수인이었던 테첼이 교회법을 넘어서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내용에 대해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늦게서야 대사의 효력과 면벌부 판매권한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고 파문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미 공론화된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한 것을 드러냈다. 이후 레오 10세는 1520년 루터를 파문했다. 서유럽 교회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 사태에서 레오 10세의 실책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우선 대사를 선포하는 것과, 그 대사를 헌금으로 받는 것 자체는 가톨릭 교회에서 본래 있었던 정상적인 일이었고, 이게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적 논쟁이 될지언정[* 루터의 태클 역시도 헌금형 대사보다는, 대사를 발행하는 교회의 권위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다. 즉 본질적으로 가톨릭교회란 세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레오 10세 개인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면서, 대사를 주 수입원으로 변질시킨 데다가, 대사 전문 홍보꾼을 마인츠 지역에 파견하는 등의 행위에서 레오 10세의 책임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가톨릭 내부에서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 홍보꾼들을 금지시키며 자체적인 개혁을 이루었으니, 당시 충분히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즉 본래 중세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헌금형 대사라는 시스템을 교황청의 주요 사업으로, 심지어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듯한 분위기로 변질시킨 것은 그의 실책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